뭐 해 먹고 살지
나는 요즘 다음 학기 전과를 계획하고 때늦은 진로 고민을 하고 있다. 최근 드는 생각은 그래픽 디자이너 겸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다는 것인데.. 올해가 끝나기 전에 내 삶을 한번 되짚어보고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스스로 돌아보려고 한다.
초등학생 때를 떠올려보면 간간히 허접한 만화를 그려서 친구와 공유하거나, 노트에 캐릭터와 무기같은 것을 그려서 rpg게임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도 했었다. 시험시간에 시험지에 낙서하는 것은 기본이었으나 평소에 각잡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물절약 포스터 그리기, 불조심 포스터 그리기로 교내에서 입상했던 기억도 있다. 그림을 친구들보다 살짝 더 잘 그리니까 흥미는 있었는데 열정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당시 장래희망은 일관적이게 사육사로 적어냈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10년 후 나의 모습 그려보기'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나는 호랑이, 사자, 코끼리 등등 거대한 동물들에게 둘러싸인 사육사의 모습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물과 교감하는 것에 대한 엄청난 로망이 있었다. 점점 학년이 올라가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알게 되어 사육사보다는 애견 쪽으로 범위를 좁히게 되고..
스무살이 됐을 때 직업전문학교에 들어가서 반려동물에 관련된 여러 분야를 찍먹해봤다. 그 후 애견카페 아르바이트를 1년동안 즐겁게 하고 입대를 하게 된다.
애견 훈련 쪽으로 진로를 잡고 싶어서 경찰견 핸들러로 4번 정도 지원했으나 모조리 떨어졌었다. 이때 일찌감치 안 될 운명이라는 걸 느끼고 진로를 다시 설정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지금보다 더 게을렀던 나는 다른 분야를 처음부터 시작하기가 몹시 귀찮았던 것 같다.
전역을 하고서는 당연하게도 애견 쪽으로 취업을 하게 됐는데, 애견카페에서 알바할 적에 알게된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있다.
나에게 개털 알레르기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젊은 패기로 눈물콧물 흘려가며 그냥 일했다.
그런데 점점 다른 부분에서도 엇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강아지와 노는걸 좋아하는거지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인터넷에서 좋아하는 일 vs 잘하는 일을 주제로 의견을 주고 받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 싫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잘하는 일을 해야한다.' 라는 주장이 많다. 나는 이 말을 어느정도 체감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강아지들에게 둘러싸여 기가 빨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일을 그만두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퇴사를 하고 나서는 말그대로 망망대해에 던져진 느낌이 들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자유롭게 헤엄치는 기분은 나에게 은근한 해방감을 줬다.
그때가 2021년 초였는데 주식 투자 수익이 썩 괜찮아서 전업 투자를 해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초심자의 행운을 실력으로 착각해서 아주 오만한 생각을 했었음을 지금은 뼈저리게 알고 있다. (알고 싶지 않았다ㅠ)
당시에 모아둔 돈을 어떻게 활용하는게 좋을지 고민하면서 부동산 경매 수업도 들어보고, 유행하던 스마트스토어도 운영해봤다.
누군가의 지시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자유롭게 내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때 내 자신을 더 잘 알고 싶어서 MBTI검사도 처음 해봤는데, 내 유형과 어울리는 직업에 개발자가 있었다.
왜인지 '개발자'라는 단어에 꽂혔었고 찾아보니 나와 정말 잘 맞을 것 같았다. 그리고 멋있어 보였다.
곧바로 국비지원 학원을 등록해서 개발을 배웠다. 근데 이제 대충을 곁들인..
음악 작곡도 아주 조금 해봤는데 다 어정쩡한 상태에서 그만두게 됐다. 나는 끈기가 참 없다. 흥미가 안 생기는건 금방 포기해버리기 일쑤다.
백수로 지내다가 돈이 궁해져서 코인투자와 NFT투자에 발을 들이게 된다. 코인/NFT 시장은 24시간 열려있기 때문에 생활패턴이 무너져서 굉장히 피폐해질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된다. (이 역시 알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NFT투자로 100배 수익이라는 놀라운 수익률을 경험하고 눈이 돌아가버린 나는 수익을 현금화 하지 않고 그대로 전부 재투자 하는 판단을 내렸다.
아주 짓궂게도 그 타이밍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ㅋㅋ 이 상황에서 제일 얄미웠던 부분은 입찰가를 많이 넣은 순서대로 화이트리스트를 주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거 준비하느라 현금을 있는대로 끌어모아 이더리움으로 환전해놓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일명 푸틴빔을 맞은 내 자산(이더리움 + 들고있던 NFT)들은 바닥으로 매섭게 곤두박질쳤다. NFT는 하락할 때 그 자체의 가격도 떨어지고 거래의 매개체인 암호화폐의 가격도 같이 떨어지기 때문에 두배로 손해를 본다. 현금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서 하락을 버틸 자신이 없던 나는 패닉셀로 끝을 내고 만다.
이 시점에서 가까운 미래에 나는 전재산 탕진 + 백수 장기화 + 이별까지 쓰리콤보를 맞아 인생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마침내 노동의 소중함을 알게 된 나는 정신을 차린 후 밖으로 나가 알바를 구했고, 알바를 하면서 전에 배웠던 개발에 미련이 남아 개발자 취업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한다. 이 시기에 개발자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자 개명까지 했던 것이다.
그 뒤로 최근까지 개발 공부를 했다. 조금이라도 경쟁력을 얻기 위해 사이버대에 입학하기도 했다.
중간에 인생의 암흑기도 지나고, 이력서도 200군데 넘게 넣어서 면접도 보고 왔으나 최선을 다 했다고는 못 하겠다.
배울 때는 강사님 코드 따라치는게 대부분이었다. 프로젝트할 때는 어디선가 베껴온 코드를 살짝 변형해서 쓴다거나 챗지피티의 도움을 받은게 대부분이었다.
내가 작성한 코드가 어떤 흐름으로 데이터를 전달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 했고, 알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팀프로젝트에서는 책임감 하나로 맡은 부분을 꾸역꾸역 동작하도록 만들었고 그에 따른 보람도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었다. 무언가를 더 만들고 싶다거나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얼마 전에 취미로 그림을 다시 그려보고자 인스타 계정을 만들었다. 탐색 탭에서 여러 작가님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감탄하는게 하나의 취미가 됐는데, '이런 그림은 대체 어떻게 그리는 거지', '나도 이 정도로 그려보고 싶다', '그림 잘 그려서 부럽다' 등의 생각을 자주 한다.
코딩을 배울 적에는 '강사님 코딩 잘 해서 부럽다', '나도 이런 코드 짜보고 싶다' 같은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검은 화면에 코드를 끄적이는 내 모습이 좋았던 것이지 흥미가 있어서 개발을 잡고 있던게 아니었다.
이 블로그에 작성한 첫 글에서 개명은 도피라고 말했다. 그 개명의 표면적인 이유인 개발 역시 일종의 도피처였던 것이다.
그래서 전과를 결심했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정말 목적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그림은 초등학생 때부터 깔짝깔짝 꾸준히 그려왔다.
어버이날에 부모님을 그려드리거나 형이랑 나를 캐릭터처럼 그려서 드린 적도 있다.
게임만 주구장창 했던 중고등학생 시절에도 낙서를 하거나 좋아하는 캐릭터 모작을 하거나 했다.
퇴사했을때 이모티콘을 그려보고 싶어서 갤럭시탭을 샀었다. 그때 했던 낙서들이다.
NFT할 적에 그린 팬아트들.. 에어드랍이나 화이트리스트 당첨돼보겠다고 그렸었다. 지금 보면 진짜 의미없는 짓인데 재미는 있었다.
쓰다 보니까 사족이 붙어 말이 참 길어졌다. 글 제목에 대한 대답은 그림 그리는 일로 먹고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인스타그램 탐색탭에서 좋은 작품으로 내게 충격과 자극을 준 작가님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
직업적으로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현재 내 실력을 보았을 때 시간이 꽤나 걸릴듯 하다.
그래서 우선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면서 살고자 그래픽 디자이너를 목표로 디자인학부에 들어가기로 했다.
취업 분야로는 UI/UX 디자인이나 프론트엔드 개발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래픽 디자이너가 일러스트레이터를 겸했을 때 가장 시너지가 좋을 것 같다.
먼 훗날 이 글을 다시 봤을 때 단순히 방황했던 과정을 기록한 글이 아니라, 그림 그리며 사는 삶의 출발점으로써 추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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